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목의 변 (문단 편집) === 토목보의 참변 === [[파일:external/m.wanhuajing.com/2_340_220.jpg|width=500]] 결국 정통제의 군대는 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앞서 왕진이 무리하게 출격시킨 주면의 호위부대가 에센군에 처참하게 박살나버렸고, 참담한 현장을 목격한 왕진이 '''겁을 먹고''' 황제에게 철수를 건의한다. 차라리 베이징으로 돌아갔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겠으나 철수 경로에 자신의 고향지역이 포함된 것을 안 왕진이 '''자기 고향에 피해가 된다'''며[* 군대가 지나가는 마을은 물자 충당을 이유로 필히 지역민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특히 정통제가 이끄는 대군은 숫자가 많은 데다가 경군을 제외하고서는 급히 모집하여 군기까지 떨어지던 상황이라 물자 충당만으로 지역에 초토화될 수 있고, 자칫 행패나 조직적인 약탈까지 벌어질 수 있다. 여기에 당시 중국은 성공해서 고향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큰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인맥도 있었다.] 먼 길을 돌아가게하는 멍청한 짓을 벌였고, 철수가 늦어지는 와중에 에센군이 보낸 추격대에 몰려 정통제의 군대는 인근 토목보로[* 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 화이라이 현 투무 진.] 숨어들게된다. 문제는 토목보가 원래 [[거용관]](居庸關)의 전선에 설치된 소규모 작은 성, 곧 보(堡)에 불과하였으며, 많은 병사와 전마들이 마실만한 수원(水源)과 대군을 보호할 만한 방어 시설이 부족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마실 물도 없는 곳에 고립된 명나라군은 점차 피폐해지다가 에센군의 기습 공격에 전면 붕괴, 왕진은 사망하고[* 진중의 중신과 장수들이 황제의 신변을 우려하여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황제만이라도 베이징으로 모시려고 했다. 실제로 이렇게 되었다면 최소한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만은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왕진은 정통제가 없으면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워진다는 이유로 끝까지 방해했고 오히려 이 충신들을 마구 모함하여 벌을 내리게 하는 짓을 벌였다. 결국 안 그래도 만인의 미움을 사던 왕진은 증오를 받았고 에센군의 공격에 토목보가 무너지자, 분노한 명나라 장군 번충에 의해 죄상을 추궁당한 뒤 번충이 직접 내려친 철퇴에 '''맞아 죽었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왕진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려죽였는데도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전부 기뻐했으며 정통제도 어찌하지 못했다. 번충은 황제를 피신시키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에센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다.] 수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전사했으며 황제 정통제는 에센의 '''[[포로]]'''가 되는 참극이 벌어진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히고 장보를 비롯한 조정의 상당수 공경대신과 장군들이 전사했으며, 수도를 지키는 정예군인 경군이 그 장비와 함께 전멸하는 바람에, 명나라는 '''수도 베이징성이 거의 무방비 상태로 대혼란에 빠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